
처음부터 브랜드 디자이너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미국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던 시절, 작업물을 페이스북에 올리곤 했다. 그러다 친구들에게 동아리 로고나 엠블럼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기 시작했다. 부탁이 늘어나자 작업에 들이는 시간을 생각해 작업비를 받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동아리 예산으로 비용을 지불했다. 공부하며 만든 작업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이 되고, 돈을 받는 일로도 이어진 것이다.
의뢰는 입소문을 타고 학생 창업가와 학교 주변 소상공인에게까지 이어졌다. 로고 하나를 만들던 일이 광고물과 간판, 웹사이트, 촬영으로 조금씩 넓어졌다. 그때는 이 모든 일을 ‘브랜딩’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필요한 일을 하나씩 하다 보니, 작은 사업이 자기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에 함께하고 있었다.

일을 받다 보니 회사가 필요해졌다
사업자와 거래하려면 디자인 파일만 보내서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 계약을 하고, 영수증을 발행하고, 거래를 정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LLC를 설립했다.

처음부터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들어오는 일을 제대로 맡고 마무리하려다 보니 회사가 필요했다. 디자인 외에도 챙겨야 할 일이 하나씩 생겼다.
개발자로 창업한 친구들과는 웹사이트 작업을 함께했다. 친구 회사로 의뢰가 들어오면 내가 디자인을 맡았고, 내 회사로 들어온 의뢰는 친구 회사가 개발을 맡았다. 서로의 일을 연결하면서, 내가 디자인한 화면이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웹사이트가 되는 과정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로고를 부탁했지만, 보여줘야 할 건 더 많았다
그때 만난 학생 창업가들에게는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었다. 다만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로고를 만드는 일에도 그 고민이 들어왔다. 어떤 사업인지, 누구에게 필요한지, 어떤 인상으로 기억되면 좋을지. 모양을 고르는 데에도 사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로고가 완성된 뒤에도 정해야 할 것은 많았다. 이 서비스가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웹사이트에서는 무엇을 먼저 보여줄지, 간판에서는 어떻게 알아보게 할지, 사진에서는 어떤 모습을 담을지도 정해야 했다. 결과물은 달라도 같은 사업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흥미를 느꼈던 것도 그 연결이었다. 하나의 그래픽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했지만, 그 그래픽이 쓰일 곳과 전달할 메시지를 함께 생각하는 쪽으로 관심이 넓어졌다.

디자인 옆에 있는 사업이 궁금해졌다
그래픽 학사를 마친 뒤에는 석사 과정에서 기술경영을 공부했다. 디자인이 필요한 사업의 맥락을 더 이해하고 싶었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와 함께, 왜 그것이 필요한지도 생각하고 싶었다.
이후 미국 광고 에이전시를 거쳐 한국으로 왔고, 작은 조직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9년차 브랜드 디자이너로, 신생 스타트업부터 설립 10년차 회사까지 네 곳의 스타트업을 경험했다. B2B와 O2O처럼 사업의 성격도 달랐다.
같은 직함으로 일해도 필요한 일은 회사마다 달랐다. 처음 모습을 갖춰야 하는 곳도 있었고, 이미 익숙한 브랜드로 더 넓은 방향을 보여줘야 하는 곳도 있었다. 만들어놓은 기준을 여러 사람이 함께 쓰게 하는 일이 중요한 곳도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지에 더해, 이 회사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거기에 내 경험과 판단을 어떻게 보탤 수 있을지를 함께 보게 됐다.
여전히, 필요한 일을 찾는 중
작은 회사에서는 일이 늘 깔끔한 이름표를 달고 오지 않는다. 로고를 부탁받고 시작했는데 웹사이트까지 만들게 됐던 것처럼, 한 가지 일을 하다 보면 그 옆에 필요한 일이 보인다.
신생 회사에서는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 오래된 회사에서는 그동안 쌓인 것들을 정리해야 할 때도 있다. 하나를 마무리하려고 들여다보면, 옆에 있던 일이 감자 줄기처럼 딸려온다.
그렇다고 보이는 일을 전부 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작은 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무엇이 필요한지 보는 것만큼, 그중 무엇을 먼저 할지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 그 판단을 하려면 디자인 밖의 사정도 알아야 한다.
지금도 브랜드를 만들 때면 비슷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회사는 누구에게 무엇을 설명해야 할까.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는 곳에서, 지금 가장 먼저 정리할 것은 무엇일까.
친구의 로고를 만들던 때와 지금의 일은 규모도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누군가 하려는 일을 이해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해질 모습을 함께 찾는 일은 여전히 재미있다. 친구들 로고를 만들던 일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